장애인신문 1000호 발행, 그들의 회고

복지 발전의 커다란 축, 장애계단체와 장애인신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김동범 사무총장

1991년 1월~1999년 9월까지 중간에 2년 공백 기간을 제외하고 6여 년간 장애인신문에서 일했다. 처음에는‘몇 달만 도와 달라’는 말에 기획실장으로 들어갔는데, 재정적인 어려움 등으로 편집국장 일을 도맡아 신문을 만들었다.

나는 평소 장애인 문제에 관심도 없었고 전공 또한 토목으로 장애계와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일하면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자 가치 있는 일이라고 느꼈고, 지금까지 장애계에서 일하는 계기가 됐다.

나 외에도 장애인신문에서 일했던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장애계 현장에 남아있다. 또한 장애인신문 독자로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도 있는데, 그 중 故이현준 활동가가 기억에 남는다.

장애인신문은 19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 이후 장애인의 문제를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일반 언론에서는 장애인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한 번은 최규옥 발행인과 내가 광고를 받기 위해 정장을 차려입고찾아갔는데‘, 장애자신문’이라고 인사를 다하기도 전에‘장애자’만 듣고 상대방이 ‘아까도 왔는데 또 왔느냐’며 박대한 적도 있다. 그만큼 언론에서 장애인 문제를 다루더라도 4월 20일, 시혜적이거나 동정적, 인간 승리가 주를 이뤘다.

사회복지 발전에는 두 개의 큰 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당사자로서 문제를 알리고자 직접 행동한 장애계단체, 또 하나는 그들의 활동을 알리는 언론사였다. 장애계단체는 사회적 관심을 끌기 위해 교통 중심지의 도로를 점거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방송에는 나갔지만 도로를 점거한 이유는 나가지 않았다. 단지 장애인이 도로를 점거해 차가 막히니 장애인이 사회의 악이 되는 그런 보도였다. 장애인신문은 장애인의 시선으로 그들의 활동을 알려내는 역할을 했다.

장애인신문은 장애인 문제를 더 많이 알리고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게 하고자, 유명 인사 또는 대중적인 인물들을 만나기도 했으며 그러한 사건도 다뤘다. 당시‘일간지 같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통령 선거 후보를 만나 장애인 복지 정책에 대해서 물었던 언론사는 장애인신문밖에 없었다.

그동안 많은 장애인 복지 관련 신문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도 했고 만들어지기도 했다. 종이에서 온라인으로, 온라인에서 방송까지 발전한 사례는 없다. 그동안 장애인신문이 장애인 복지 발전을 위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누가 신문사고 누가 독자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소통하고 교류하는 신문이길 바란다.

아울러 정보화 시대에 맞춰 발 빠르게 정보를 전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애인 운동을 함께한 장애인신문

에이블복지뉴스 백종환 대표

1990년 1월 3일~1992년 9월, 1998년 1월~1999년 8월 장애인신문에서 일했다. 편집차장으로 시작해 실질적인 편집국장의 업무도 대행했다.

종이신문 16면을 냈는데, 그때 당시로는 전문지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많은 쪽수였다. 손수 원고지에 기사를 적는 것부터 사진을 현상하고, 지방의 소식을 화물로 건네받는 등 고생도 많았고 그만큼 열심히 뛰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장애인의 오적(五敵)을 만든 것이다. 말 그대로 장애계에서 물러나야할 인물 다섯 명을 설문 조사해 기록했다. 당시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장기철 회장 등이 올랐는데, 누군가 함부로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실어 큰 돌풍을 일으켰다. 개인적으로 내 이름을 알리고 싶었고, 장애인신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한 가지 더 기억에 남는 일은 한 장애자녀의 부모가 보내온 편지였다. 장애인신문에 실린 뇌병변장애 관련 기고를 보고 뇌병변장애가 있는 자녀에게 그대로 했더니, 자녀의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는 내용이었다. ‘장애인신문은 나에게 하느님이다’고 표현한 게 특히 감동적이었다.

반대로 장애인신문을 무상으로 배포한 데 대해 한 학생이‘대문에 꽂혀 있는 장애인신문을 볼 때마다 장애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상처가 된다’고 말해 생각을 전환하는 계기가 된 적도 있다.

지금 장애계 관련 언론사 대표를 맡고 있는 나로서 장애인신문은‘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간섭하지 않고 놔뒀기’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으며 정립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됐다. 뜻하지 않은 일로 두 차례 그만두기도 했지만, 장애인신문에서 일한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장애인신문은‘장애인 운동과 함께했다’고 말하고 싶다. 당시 19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 반대 운동부터 장애인 해방 운동, 장애인 인권 회복 운동 등이 갓 시작해 일고 있었는데, 정책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운동을 한다고 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화제가 돼야 하고 여론이 확산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신문은 단순히 정보나 소식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애인 운동의 궤를 같이했다고 본다.

장애인복지법, 장애인고용촉진법, LPG 지원 등 장애계에서 원했던 욕구들을 전파하고 쟁점화 했고 이것들은 하나의 정책으로 만들어졌다. 어느 나라에서도 장애인 복지가 이렇게 빨리 온 사례는 없었고, 의미 있다고 본다.

이제는 시대가 변한만큼 작은 것들을 챙겨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인권이나 권익에 치우치면 작은 것들을 지나치기 쉬운데, 사실 일상생활에서는 작은 것들이 크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는 생활과 밀접한 정보들까지 알차고 신속하게 다뤘으면 한다.

또 다른 현장에 뛰어들게만든계기,‘ 인권’을잣대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옥순 사무총장

1990년~1991년 12월까지 취재기자로 지냈다. 이전에 나는 노동 관련 월간지에서 일했는데, 정부의 탄압을 받고 굉장히 치열한 현장에서 당사자로 참여하고 취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의 현실은 노동 운동이 사치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열악했다.

당시 장애계 상황은 장애인이 처한 문제를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작업들을 시작하는 단계였고, 그나마 장애계 전문 기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위안이 되는 시대였다. 장애인복지법·장애인고용촉진법 투쟁과 함께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은 보였지만, 현장에서 뛰는 기자의 입
장에서는 열심히 취재해도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게 없다고 느껴졌다.

장애인 문제와 관련해 아주 자극적인 사건만 일반 언론을 탔고, 영향력이 얼마나 컸을지는 모르겠지만 장애계 전문 기자들만이 장애인 문제를 알리는 데 주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사를 쓰고 신문이 나가면 다음 주에 바로 문제 제기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특히 장애인거주시설 비리나 인권 침해 사건을 다루면 해당 시설의 대표나 단체의 장이 항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회적 화제로 솟아오르진 않았고, 장애인의 현실이 척박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장애인차별철폐의날이라고 하는 4월 20일, 지금처럼 정부가 주도하는 행사가 그때도 치러졌다. 수많은 장애인들을 동원하다시피해서 앉혀놨고, 상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박수치는 사람으로 나눠진 행사였다. 유명 연예인들이 나오는 문화행사도 있었는데, 정작 장애인은 문화행사를 보러 온 사람들에 가로막혀 무대도 보지 못한 채 멀뚱히 있어야 했다. 그 사진을 다른 기자가 찍었는데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과연 이런 행사가 장애인의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기사를 썼는데, 1년이 지난 뒤 또 똑같은 기사를 연거푸 써야만 했다.
장애인신문에서 일하면서 나는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현장에서 뛰다가 체계적인 내용을 갖출 필요를 느껴 뒤늦게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많은 언론이 취하는 태도 중 하나가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관점이 없는 기사를 싣곤 한다. 정부의 정책을 분석하고 다양한 의견을 싣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람과 관련된 일인 만큼‘인권’을 잣대로 삼았으면 좋겠다.

장애인신문은 나를 뛰게 한‘자부심’이었다

민주사회정책연구원 장애정책팀 이미정 연구위원

1995년~2000년까지 취재기자로 일했다. 당시 정예 인원 4~5인이 기자로 뛰고 있었는데, 하루에 두 시간도 채 못 자며 코피 쏟아지게 일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처음 들어갈 때는 신문사에 대한 평도 안 좋았고, 무엇보다 형편이 열악해 평균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으며 활동했다.

낮에는 현장을 돌아다니며 취재하고, 하루 기본 다섯 곳의 취재 기관을 돌았다. 보통 저녁 일곱 시가 돼서야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공부하면서 기사를 썼다. 단순한 보도 기사가 아니라 분석 기사를 요구했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했고, 기사를 쓰다보면 퇴근 시간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집에 와서도 새벽 세 시에‘취재 와 달라’는 연락이 오면 달려 나갔다. 나를 비롯한 장애인신문 기자 모두 사회복지 관련 전문인이었기에‘장애인이 있는 곳에 우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어떤 기자는 잠시 피로를 풀기 위해 목욕탕을 갔다가 기절한 적도 있고, 나 역시 교통사고로 척추가 부러졌음에도 보조기기를 착용한 채 취재를 나가기도 했다. 그만큼 일이 재밌었고 보람 있었다.

처음에는 관심을 주지 않던 곳도 이러한 기자들의 모습에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행동에 기사를 쓰면 그에 대한 반응이 바로 왔다.

특히 지금의 서울정인학교 설립을 두고 지역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한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지역주민들이 매일 집회를 열었고, 비닐봉지에 오물을 섞어 던지기도 했으며, 경찰들과의 충돌도 만만치 않았다.

지역주민들은‘땅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가장 컸기에, 서울 지역 장애인시설이 위치한 근처 부동산을 일일이 찾아 장애인시설이 들어오기 전과 후의 땅값 변화를 알아봤다.
행정기관에서는 그 기사를 참고자료로 쓰고, 서울정인학교 설립을 반대했던 지역주민들에게 막상 객관적 근거를 들이대니 막연히 반대하던 목소리도 차츰 줄었다.

장애인신문의기자들은 당장 처한 개인의 상황은 힘들었지만 지치는 것을 모를 정도로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확신과 ‘그어 떤 기자도 장애계와 관련해서는 우리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많은 장애계 관련 언론사의 등장과 함께 일반 언론에서도 장애인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장애인신문이 갖고 있는 의미를 돌이켜보고 보다 언제나 현장과 함께할 수 있는 장애인신문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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