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부에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빼앗긴 권리, 그로 인한 피해를 이자까지 쳐서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장애인과 그 가족은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고 비하할 것이 아니라 떳떳이 나서고 떳떳이 요구해야 한다.
이제 복지는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국가유지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복지예산이 국방예산의 사분의 일도 안 되는 우리나라에 비해 독일의 경우는 복지예산이 국방예산의 두 배에 달한다는 것만 봐도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 故 이현준 열사가 월간 ‘함께 걸음’에 독자 투고한 글 중. 1992년 12월
이현준열사추모사업회(이하 추모회)는 14일 서울시 광화문 해치마당에서 故 이현준 열사 9주기 추모제를 진행했다.
故 이현준 열사는 함께 걸음 기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책실 활동가로 활동하면서 장애인 기초연금제, 성년후견인 제도, 장애인 콜택시, 장애인차별및권리구제등에관한법률(이하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정책을 제안했다.
故 이현준 열사는 근이영양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으며, 2005년 3월 16일 새벽 가래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결국 삶을 달리 했다.
이번 추모제에는 故 이현준 열사의 유가족을 비롯해 추모회 오영철 집행위원장 등 관계자 30여 명이 함께 했다.
추모제 사회를 맡은 강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박현 소장은 “故 이현준 열사는 소주 세 잔 이상을 못 마셨지만 술 모임에 참석하면 항상 끝까지 있었다.”며,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이어 “故 이현준 열사는 2002년 420 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투쟁 때 특별교통수단을 제안했다.”며 “장애인 콜택시가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강력히 투쟁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김영희 사무국장은 “회의장 장소로 가는 길에 혜화동 뒷길에서 만난 적이 있다. 더운 날에 회의장소를 함께 찾아가면서 왜 이리 힘든 곳에 회의장이 있는지 서로 투덜대며 갔었다.”며 “故 이현준 열사가 휠체어에서 내리지 못해 그대로 잠든 일이나 승강기 단추를 누를 수 없어 다른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렸던 일 등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문제에 대해 함께 공감하고 듣고 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한 사람.”이라고 추모했다.
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진우 활동가는 “나도 故 이현준 열사와 같은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다. 지금은 활동지원제도가 어느정도 있지만, 故 이현준 열사가 활동했던 당시에는 그마저도 없어 잠자리에 들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김 활동가는 “최근에 호흡이 어려워 며칠 동안 앉아있거나 잠을 못 자는 경우가 있었다. 故 이현준 열사의 뜻에 부합하는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시민연대 배융호 사무총장은 “故 이현준 열사가 호주에서 저상버스를 타본 뒤 이것이 한국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이어갔다.”고 떠올렸다.
또 “故 이현준 열사가 살아있었을 때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가 이뤄졌다면, 故 이현준 열사는 여기 함께 있었을 것.”이라며,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와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故 이현준 열사의 동생 이현제 씨는 “내년이면 이번 추모제가 10주기를 맞는데 내년에는 정말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가 폐지됐으면 한다. ‘고생’이란 말과 ‘절망’이란 말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상상행동 장애와 여성 마실 김광이 활동가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총칙에 장애인에 관한 삶의 이념을 넣어야 한다면 여기에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을 넣어야 한다고 처음 제안한 사람이 故 이현준 열사.”라고 밝혔다.
현재 故 이현준 열사가 제안한 자기결정권 및 선택권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7조에 명시돼 있다.
한편 이번 추모제에는 가수 이지상 씨의 문화공연이 있었으며, 분향 및 헌화로 고인의 정신을 잇고 넋을 기리는 시간이 마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