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거주시설서 숨진 故 김주희 학생 부모 인터뷰

▲ 어머니 김지연(왼쪽) 씨와 아버지 김혁수(오른쪽) 씨가 故 김주희 학생과 관련된 서류들을 펼쳐놓고 억울한 죽음에 울분을 터뜨렸다.
▲ 어머니 김지연(왼쪽) 씨와 아버지 김혁수(오른쪽) 씨가 故 김주희 학생과 관련된 서류들을 펼쳐놓고 억울한 죽음에 울분을 터뜨렸다. ⓒ안서연 기자
“내가 죽은 뒤에도 우리 주희가 살 수 있도록, 어떻게든 교육 시켜서 살아갈 수 있게 하고자 했던 것뿐인데…….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지난달 8일 충청북도 충주시 한 시각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장애학생이 숨진 채 발견됐다. 시설 측 진술에 따르면, 발견당시 해당 학생은 무릎을 꿇고 앉은 상태에서 의자 등받이와 팔걸이 사이에 목이 끼어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 ‘사인 불상’으로 판명 났다. 가혹행위 및 타살 흔적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다만 경찰은 시설 측에 24시간 관찰·보호 의무 소홀 등 과실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비록 타살 흔적이 없고 사망 원인은 불명으로 판명 났지만, 부모는 ‘사회적 죽음’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숨진 학생의 이름은 김주희(12). 그는 어린나이에 경기도 화성시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과 떨어진채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게다가 주민등록상 실제 부모가 아닌 시설원장의 가족으로 들어가 있었다. 이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감수해야만 했던 것들이다.

故 김주희 학생의 부모 김혁수 씨와 김지연 씨는 “장애인 부모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그마저도 이런 결과로 돌아왔다. 온 가족이 주희에게 매달리며 살지 않아도 됐더라면, 주희가 집과 가까운 곳에서 교육 받을 수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장애학생이 동등한 교육을 받지 못하는 현실, 장애인 가정이 벼랑 끝에 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원망스럽다.”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중증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 故 김주희 학생.
▲ 故 김주희 학생.
김혁수 씨와 김지연 씨의 다섯 자녀 중 넷째인 故 김주희 학생과 셋째 김우희 학생은 쌍둥이로, 시각장애 1급이다. 2001년 6월 10일, 6개월 만에 ‘초극소 미숙아’로 세상 밖에 나온 이들은 자라면서 시신경이 점점 녹아 없어지는 미숙아 망막증 판정을 받았다.

자매 모두 뇌전증을 앓고 있었으며, 김우희 학생은 수두증으로 션트 수술을 받았다. 故 김주희 학생은 뇌병변장애 4급 판정을 받았으며, 따로 장애 판정을 받지 않았지만 지적 능력 및 인지 능력이 낮았다.

故(고) 김주희 학생의 어머니 김지연 씨는 “우희와 주희는 태어나서부터 병원생활을 오래했다. 태어나자마자 특수 인큐베이터에 들어갔고, 특수 산소를 썼다. 아이들이 크는 데 도움이 된다는 특수 분유와 특수 오일을 먹여야했다. 만만치 않은 비용이었지만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미숙아 망막증 관련 수술을 받아야했는데, 미숙아다보니 1년이 지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우희와 주희가 태어나고서 6개월간 중환자실에서 매일 기다리고, 수술실 앞에서 아내와 번갈아가며 잠을 잤습니다. 그러다보니 직장생활이 감당 안 되더라고요. 한 달 유급 휴가 이상은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다고 해서 사표를 냈습니다. 당시 첫째와 둘째도 어린 나이였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니 택시밖에 없었습니다.”

김혁수 씨는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개인택시에 뛰어들었지만, 예고 없이 닥치는 응급상황 때문에 제대로 일할 수 없었다. 김지연 씨는 당시의 상황을 ‘아이들이 언제 죽을지 몰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의사가 지켜본 뒤 출생신고 하라고 했지만, 출생신고를 해 놓으면 오래 산다는 말에 우겨서 했을 정도’라고 표현했다.

택시를 운전했지만 사납금 채워 넣기에도 빠듯한 상황은 이어졌고, 기본급만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결국 퇴원을 결심했다. 이들 자매가 태어난 지 6개월, 늘어나는 병원비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안정적이던 가정은 한 순간에 무너져 경기도 화성시에서만 10번의 이사를 치러야 했다.

김혁수 씨는 “근처에 있는 복지관을 비롯해 재활치료를 받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하루 10시간씩 우희와 주희의 재활치료에 매달렸다. 사회생활이 전혀 안 되다보니 국민기초생활수급 대상까지 됐고, 자신감까지 잃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좌절감과 실망감을 견디지 못해 강원도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하는 순간 故 김주희 학생의 상태가 거짓말처럼 좋아지기 시작했고, 김혁수 씨는 다시 한 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주희가 네 살 때까지 손과 발을 움직이지 못했어요. 생활 형편은 안 좋을 대로 안 좋아지고, 더 이상 갈 길이 보이지 않아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강원도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죠. 그때 ‘주희가 처음으로 일어났다’고 연락이 왔어요. 순간 죄책감이 들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돈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아이들과 컵라면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올라왔어요. 가서 봤더니 재활치료실 안에 주희가 선생의 손을 잡고 서 있더라고요.”

‘죽을 만큼’ 힘든 현실은 계속됐다

그 뒤로도 고비는 계속 찾아왔다. 기적적으로 주희 학생은 일어섰지만, 한 걸음을 떼는 데 1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고, 병원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활동지원서비스가 있지만, 하루 2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아 부부가 늘 붙어 있어야하는 현실은 변함없었다. 다른 부모들과 만나 정보를 교환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치료와 수술은 계속 필요했고, 이미 신용불량자가 된 지 오래였던 부부는 사채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김혁수 씨는 “사채로 근근이 버텨왔다. 빚이 1억 얼마였을 것이다. 시청에서는 ‘왜 자꾸 노느냐, 택시하지 말고 도배라도 해라’라고 재촉했다. 도배하는 일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아이들 병원에 갈 것 같으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다시 개인택시로 돌아와야 했다.”며 “개인택시 시작과 동시에 국민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탈락했고, 우여곡절 끝에 개인택시로 나온 자동차를 샀는데 번호판을 달자마자 사채업자에게 빼앗겼다.”고 캄캄했던 상황을 전했다.

김혁수 씨는 국민기초생활수급 대상도, 개인택시 영업도 못한 채 한동안을 보냈다. 사채업자가 그의 집으로 찾아와 위협하기도 했고, 급기야 심장병으로 쓰러져 없는 형편에 수술까지 받았다. 사채업자는 ‘더도 덜도 말고 8,000만 원만 갚아라’고 제시했고, 김혁수 씨는 사채업자가 알려준 방법으로 개인택시용 자동차를 팔아 빚을 갚았다. 개인택시 소개비와 협회비를 빼고 남은 돈은 60만 원이었다.

그는 “사채업자에게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확인 서류를 떼 달라고 사정하고 또 사정해서 서류를 만들어 갔더니, 정권이 바뀌어서 안 된다고 했다. 당시 공무원은 ‘2개월간 긴급지원해줄 테니까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라’고 했다. 내가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먹고 살기 힘든 사람 약점을 잡아 그렇게 구는 게 어이가 없었다. 보건복지부에 전화도 하고, 여차저차해서 지금까지 왔다. 다시 신청해야 하는데, 주희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럴 여력이 없다.”고 털어놨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막상 한계에 다다르니 ‘치료를 포기하겠다’는 말이 나오더라고요. 그 말을 내뱉긴 했지만, 돌아서서 놓지 못하고 또 다시 잡게 돼요. 말은 뱉어놓고도 (포기하는 것) 그게 안 되더라고요.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서로를 의지하면서, 그렇게 흘러갔던 것 같아요.”

▲ 故 김주희 학생이 살아있을 때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냈던 모습.
▲ 故 김주희 학생이 살아있을 때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냈던 모습.
부부는 어려운 상황을 넘길 때마다, 김우희 학생과 故 김주희 학생을 아끼는 마음은 더욱 각별해졌다. 모든 일에 있어서 1순위와 2순위는 故 김주희 학생과 김우희 학생이었다. 김지연 씨는 ‘밥 먹을 때도 시어머니보다 주희와 우희가 먼저’, 김혁수 씨는 ‘마흔일곱에 낳은 아들 막내는 안 데리고 가도 주희와 우희는 꼭 데리고 간다’고 표현했다.

김지연 씨는 “사실 주희와 우희에게만 매달리며 살았다. 다른 자녀들에게 ‘주희와 우희가 먼저’라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강요했다. 아이들도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컸다.”고 속상함을 감추지 못했다.

“큰 애가 한때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어요. ‘이제는 커서 괜찮다’고 말해서 알았는데, 외톨이 신세가 돼서 밥도 못 먹고 혼자 운동장에 앉아있거나 배회하고……. 교복을 맞추면 윗도리가 없는 거예요. 신발도 없이 맨발로 올 때도 있었는데 신경을 못 썼어요. 장애인 형제를 뒀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됐던 것이죠. 아마 장애인 가정 대부분이 그럴 거예요.”

김우희 학생은 피아노 연주에 재능을 보였으며, 속도는 느리지만 수업 내용을 곧잘 이해하고 따라갔다. 반면, 故 김주희 학생은 의사소통조차 쉽지 않았다.

부부는 “주희가 걷기 시작한 뒤로 웃음과 함께 ‘우희처럼만 좀 걸었으면’, ‘대소변만 좀 가렸으면’하는 욕심 아닌 욕심이 생겼다.”며 “주희를 부모 옆에 끼고 잘 키우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내가 죽으면 누가 주희를 돌볼 것인지 걱정됐다.”고 말했다.

故 김주희 학생과 김우희 학생은 집 근처에 있는 지적장애학교를 다녔지만, 지적장애학교인 만큼 시각장애 관련 교육은 받을 수 없었다. 부부는 故 김주희 학생과 김우희 학생이 알맞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다. 2~3시간 걸리는 서울이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이었지만, ‘스스로 신변처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에 부딪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장애인부모, 침묵 깨고 더 드러내야 한다

그렇게 찾은 곳이 바로 충청북도 충주의 한 시각장애학교. 거리가 멀어 해당 학교에 위치한 시각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게 걱정스러웠지만, 재활치료와 지도교사가 24시간 관찰·보호한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았다.

부부는 故 김주희 학생과 김우희 학생이 자꾸 눈에 밟혀 매주 시설을 방문하는가하면, ‘故 김주희 학생이 아프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집에 데려와 수업을 빠지기도 했다. 학교 교사가 ‘아이들의 인권도 생각해야 한다. 아이들은 적응하는데 오히려 왜 부모님이 적응하지 못하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부부는 교육을 위해 다시 한 번 생각을 고쳤다.

“월 입소비 25만 원을 내는 게 버거워졌지만, 학교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해당 시설장 밑으로 주희의 주민등록번호를 옮겼어요. 수없이 고민했지만 주희와 우희의 앞날, 그것 하나만 보고 결정했어요. 그렇게 하면 기초생활수급 대상이 돼서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장애수당까지 합쳐서 우희 몫까지 낼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던 어느 날, 부부는 시설에서 ‘주희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 ‘감기’라는 시설 측의 말과 달리 급성폐렴이었다. 산소포화도가 갑자기 떨어져서 심폐소생술을 했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시설에서는 ‘어떠한 일이 생겨도 법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요구했고, 부부는 기가 막혔지만 ‘자식의 교육과 미래’ 앞에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김지연 씨는 “그때까지도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비참하게 내몰릴 수밖에 없는 장애인 가정의 현실 앞에 그는 비로소 “단순히 운이 없어서 죽은 게 아니다. 장애인 가정이 무너지지 않고 기본적인 생활만이라도 가능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장애인부모는 ‘내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뭐든 안 좋은 일이 생겨도 펼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려고 해요. 아마 대부분의 장애인 부모들이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방식이었어요. 더 드러내야 주변에서도 관심을 갖고 신경 쓸 것입니다. 그래야 제2의 제3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한을 품고 가는 장애어린이가 더 이상은 없어야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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