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기획 인터뷰②-류옥렬 씨

“내가 잘못한 것도 없고,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얼굴을 뭣허러 가립니까… …. 지금이라도 밝혀진 게 참만 다행이에요. (‘형제복지원법’ 제정에) 기대를 많이 하죠. 꼭 돼야죠.
나가 일을 하루 빠지더라도 나간다고 그랬어요. 우리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내 혼자서는 안 되잖아요. 여럿이 뭉쳐야지 안 되는 일도 되게끔 만들고 그러지. 우리도 활동비가 있어야지 활동하고 그러니까 한 달에 얼마씩 내고 있어요. 경제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못 내고, 낼 수 있는 사람은 내고. 그래야 인제 활동하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그래야 되니까. 누가 지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하니까, 우리 스스로 알아서 해야 되니까.”

서울시에 살고 있는 류옥렬(55) 씨. 직장을 오고가며 바쁘게 생활하는 중에도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사(실종자, 유가족) 모임’에는 꼭 참석하고자 노력한다.
길고 힘든 싸움이지만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간절히 바라는 만큼, 피해자 모두 각자 시간이 나는 대로 적극 참여하고 있다.

류 씨는 형제복지원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 애써 떠오르는 기억을 누르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별로 불쑥불쑥 떠오르지는 않는다’며 거리낌 없이 말하지만, 어느 날 뉴스 화면 아래 지나가는 자막에 ‘형제복지원’이라는 글씨가 한눈에 띄었을 정도로. 그에게 형제복지원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존재다.

자막을 본 뒤 바로 전화기를 들어 ‘형제복지원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에 연락했다던 류 씨. 그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부산시에 내려갔다가 변을 당했다.

친구 만나러 간 부산, 끔찍한 악몽의 시작

▲ 류옥렬 씨. ⓒ박광일 기자
▲ 류옥렬 씨. ⓒ박광일 기자
류 씨의 고향은 전라남도 보성군. 다섯 남매 중 첫째인 그는 생계를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음식업 일을 하고 있던 그는 1979년 21세 때 ‘놀러 와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부산시로 향했다.

“그때 초봄이었어. 좀 쌀쌀할 때. 부산 태종대 거기 가서 약주 한 잔 하고 바로 당일 올라오려고 저녁에 막차 표를 끊어놓고. 열두시 거의 다 돼서 막차가 있었어요. 지금 같으면 막 차가 빨리 저기 하지만 그때는 완행 이런 시대라. 차를 기다리다가 깜빡하고 잠들어 분 거야 거기서. 파출소 직원들이 깨워서 파출소에 데리고 가더라고. 그 당시에 부산역 앞에 파출소가 있어요. 역전파출소지.
파출소 직원들이 말도 안 하고, 어디로 간다고 허도 안 하고, 신분 확인도 안 하고. 야근통금으로 걸렸으니까 즉결로만 넘어가는 줄 알았지. 근 두 시간 있으니까 그(형제복지원) 차가 실으러 오대. 삐잉 돌아다니면서. (주변을) 한참을 지나다닌 것 같더만. 봉고차로 한차를 싣고 산으로 막 들어가는 거야.”

류 씨는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사람들의 손에 끌려 봉고차에 올랐다. 봉고차 안에는 철창이 설치돼 있었는데, ‘일종의 닭장차와 똑같았다’고 했다. 깜깜한 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봉고차 유리에 짙은 선팅은 공포를 더했다.

“야근통금으로 걸렸으면 저쪽으로 가야 하는데, 막 산속으로 들어가니까. ‘이상하다. 이제 죽었다’ 직감이 왔지. (끌려가는) 사람들도 암 말도 안 하고, 어디로 간다는 것도 모르고. 다 모르고 끌려와 버렸으니까. 새벽에 (형제복지원에) 도착했잖아요. 딱 가니까 살벌하더만요. 내릴 때부터 살벌해. 말 한자리도 허도 못하게 하고.”

류 씨가 형제복지원에서 가장 처음 끌려간 곳은 사무실. 그곳에 있던 직원들이 ‘알아서’ 류 씨의 수용카드를 적었다. 류 씨는 신분증이 들어있는 지갑 등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압수’ 당했고, 신입 소대로 옮겨졌다.

“신입 소대 들어가서 잠도 못 잤어요, 교육 받느라고. 이런 데라고 살벌한 교육을 시키니까. ‘여기서는 너그들 맘대로는 못 허고 여그 시키는 대로 해라’ 일종의 그거지. (그날 심정은) 말도 못 허지요 뭐. 아이고… …. 말로 어떻게 그걸 표현하겠어요.
인자 가족한테 서신을 일단 띄워줘요. 저그들 말로만 그러지 안 띄워줘요. 지들이 해준다는데, 나가 작성한 게 아니고 주소지로 보내준다고 허는데 뭐. 안 보내.
그 안에서는 옆에 사람하고 말도 못하게 하니까 (서로 어떤 사람인지) 말을 허도 못 허고, 물어 보도 못 허고, 어떻게 잽혀 왔느냐고 물어 보도 못 허고.”

류 씨를 비롯한 사람들은 끌려온 곳이 형제복지원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암묵 속에서 뜬눈으로 날을 샜다.
당시 신입 소대에 있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소대로 배치되지 않았고, 신입 소대에 머물렀다.

머리털과 복장 통일, 강제 예배 및 단체 기합 등 모든 게 ‘군대식’

다음날 오전 6시, 신입 소대에 있는 사람들의 머리털은 하나같이 아주 짧게 깎였다. 평상복이 아닌 형제복지원 문양이 있는 황토색 윗도리를 입고, 고무신을 신어야 했다.

“그 안에 교회가 있거든. 일어나자마자 다 앉아서 교회로 시작을 해요. 2,000인 가까이 수용될 수 있는 교회에요. 그때부터 인자 정신교육 받는 거야. 졸면 맞아요. 뒤에서 다 지키고 있어. 교회의 ‘교’자도 모르는 사람이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 못 외우면 운동장에 가서 벌 받고. 한 사람 잘못하면 다 똑같이 받아. 기합 받고, 그 넓은 길을 몇 바꾸 돌아야 되고.”

형제복지원의 ‘군대식 체제’는 모든 생활에 적용됐다. 식사도 소대별로 이뤄졌는데,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물론 음식을 남기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밥 먹을 때 줄 서서, 규율이 딱딱 정해져 있어. 밥 먹을 때 말하면 안 되고, 밥만 딱 먹고 나오는 거야. 수저 소리만 나는 거야. (다 먹어도) 혼자는 못 나와 다 같이 나와야 돼.
나가 3일을 밥을 못 먹었어요. 밥이 어떻게 되냐면 쌀 오래 된 거. 냄새 나고 막 이런 쌀. 진짜 사료로 쓸 밥을 그런 밥을. 아이고, 반찬이 반찬이겠어요? 썩은 것들 갖다가.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배가 고프니까 먹기는 먹어. ‘적게 달라’고 해서 꾸역꾸역 먹어야지. 남기면 또 맞아.”

다른 소대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식사할 때’와 ‘일할 때’였다. 같은 소대에 머물고 있는 사람과의 대화도 차단 됐기에, 다른 소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상세히 알 수는 없었다.

단지 본 것만으로 다른 소대의 상황을 증언했는데, 류 씨는 ‘장애인 소대는 밥 먹을 때 각자 알아서 먹어야 한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죽으면 개 죽음’이라고 표현했다.
또 ‘어린이들도 많이 있었다. 형제복지원 안에 공장이 많았는데, 어린이들은 볼펜 공장, 낚싯바늘 공장, 그런 데서 일을 했다’고 말했다.

“긍게 우리한테는 공개를 안 해도, (죽은 사람 등) 갔다가 어따가 살짝 해버리면 땡이야 (아무도 몰라).”

외부 인력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강제 노역의 대가는 ‘담배 세 개비’

“좀 지나니까 일을 시키더라고. 어떤 일을 시키느냐면 (형제복지원이) 주례동 산에가 있어요. 그리 차가, 큰 트럭이 못 올라와요. 저그 철길 밑에다 연탄, 삼천 몇 백 명이 묵을 식자재를 퍼놓으면 지게로 올려야 돼요. 우리는 바깥구경하는 거는 뭐이냐면 식자재 옮길 때만 철길 내려가서 지게 지고 2㎞ 올라가는 거. 며칠 만에 한 번씩 (식자재가) 들어와요. 한 번 오면 거진 하루 종일 져 올려. 일렬로 싹 지고 올라가면, 양옆으로 경비들이 다 줄을 서갖고 있으니까 도망 생각도 못하고.
밖으로 가는 소대가 따로 있어요. 그 사람들은 오래 된 사람들. 우리는 (형제복지원 안) 운동장 같은 데 돌아다니면서 손톱만한 돌 하나도 손으로 일일이 다 주서야 돼. 맨 밥 먹고 하는 일이 그거야. 청소헌다고. 이만한 돌 자락 하나도 없어(야 돼). 우리 들어갈 때 그 건물이 새로 증축한 데가 많았었어요.”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것은 새마을 담배 세 개비가 전부였다. 외부 인력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끌려오는 만큼, 형제복지원은 수용자들의 직업 및 특성별로 나눠 일을 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으면 식당 소대로, 이발소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으면 이발 소대로 배치되는 방식이었다.

▲ 류 씨는 형제복지원에서 청소 차원으로 주웠던 돌의 크기를 손톱과 비교, 혹독했던 노역의 참상을 설명했다. ⓒ박광일 기자
▲ 류 씨는 형제복지원에서 청소 차원으로 주웠던 돌의 크기를 손톱과 비교, 혹독했던 노역의 참상을 설명했다. ⓒ박광일 기자
류 씨의 머릿속에는 온통 형제복지원에서 도망 칠 생각뿐이었다. 재래식 화장실 변기를 통해 탈출하는 방법도 생각하고, 목욕실(소대에 있는 씻을 수 있는 공간, 물이 좋지 않았다) 천장을 뚫고 나가는 방법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에 그칠 뿐,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담이 교도소 보단 더 높아요. 담으로는 도저히 못 넘어가고. 반항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어요. 반항하면 뭐 죽을라고. 어딜 가도 경비원들이 항상 몽둥이 들고 따라댕기는데 뭐. 거 선도실이 있어요. 사람 잡는 선도실이 있어. 탈출하다가 잽힌 사람을 진짜 반죽음(상태)를 만들어 가지고 ‘봐라’, 이렇게 갖다 놔. 직접 보라고. ‘너그도 탈출하다 걸리면 이렇게 된다’ 본보기로. (죽은 사람을) 저그들만 어떻게 해 불지. 죽은 것은 못 봤지만, 눈앞에서 사라지면 죽은 거지.”

낫 들고 산 속에서 3일을 보내다

“그러다 희안한 계기가 됐어요. 형제복지원 젤로 우에 보면 교회가 있어. 여름이라 풀이 많이 자라니까, 우리 소대에서 풀 베는 작업을 하러 갔어. 기회는 이때다. 다른 데는 다 담 쳐져 있는데, 그가 산하고 철조망이 쳐 있는데 유일하게 쪽문이 있어요. 교회가 비탈길에 계단도 여러 개 올라가야 돼. 나가 무기가 없었으면 탈출 생각도 못했어요. 무기가 있기 때문에, 낫 들고 나는 여그서 이 기회 놓치면 이제 없다.
다섯 사람이 말로는 못 허니까 눈을 깜빡깜빡해 갖고 탈출했어요. 오면 모가지 처 불기로 하고. 우리는 계속 도망가면 잽히게 돼 있어. 왜 잽히냐면 경비는 산악훈련을 전문적으로 허니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이판사판이지. 거 안에서 있어도 똑같고 죽어도 똑같고 (아무도) 모르는 건디. 네 죽고 나 죽고 이런 식으로 나왔지. 만약 잽혔다, 나도 죽지. 나도 세상에 없지 지금.”

8월 여름 어느 날, 류 씨는 낫을 들고 밖을 향해 뛰었다. 다섯 사람이 함께 나와 각자 도망쳤다.
류 씨는 무작정 뛰다가는 경비에게 잡힐 것 같은 불안감에 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윽고 류 씨의 바로 옆으로 경비원들이 지나갔다.

“와, 진짜 간이 배 밖으로 나와 불더라고 그냥. 그 풀 속에서 컴컴할 때까지 웅크리고 있었죠. (형제복지원) 그 사람들은 누가 탈출하면은 고속버스, 역, 이런 데로 젤로 먼저 가 있어. 그래 난 그것을 눈치 채고 산속에서 3일을 안 내려와 버렸어.
깊은 산중이니까 암만 남자라도 혼자 있으니까 무섭잖아요. 반바지 입고, 고무신 신고, 보이진 않지, 내려오는데 가시가 온 사방에 다 긁어가지고 온 데가 피야 피. 그래 가지고 민가 가까운 산으로 내려와서 딱 3일을 거기가 있었어요. 식사는 못했죠. 쫄쫄 굶고.”

류 씨는 산에서 나오기 직전까지 낫을 손에 꼭 쥐고 있다가 버렸다. 곧바로 시내로 나가면 다시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갈까봐, 철길을 따라 부산진역으로 갔다. 부산진역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이러다가 잡혀가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를 떨칠 수 없었다.

“역 직원헌테 얘기를 했죠. 나가 옷을 이렇게 입고, 머리 빡빡 깎았지 이래하고 있으니까. ‘사실 이래서 나왔는데 서울을 갈라고 그러는데 차 좀 탈 수 없느냐’ 하니까, ‘여기서는 차가 떨어졌고 부산역에 가면 막차가 있을 거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또 철길 따라서 부산역에 갔어요. 말 안 하고 타면 도동(도둑) 승차니까 역 직원한테 말을 허고 탈라고 그런다니까 타라고 하더라고요. 인자 그 사람들도 아마 알고 있는 건지. 그 당시에 열차 좀 타장께 두말없이 타라고 하더라고.”

류 씨는 청량리역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다른 승객이 삶은 달걀을 먹는 모습을 보자, 참았던 허기가 솟구쳤다.

“뭔 생각도 안 나요. 배가 고프니까. 이건 뭐 기력은 떨어져 불고 생각이 나야지. 그 당시에 집에서 삶은 달걀 같은 거 싸오잖아. 그냥 입에 삶은 달걀을 대는 데 확 떼버리고 싶더라니까. 거 안 볼라고 화장실에 가 있었어요.”

류 씨가 청량리역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연락한 상대는 고향친구였다. 류 씨는 고향친구가 사준 밥을 먹고는 온몸에 힘이 빠져 버렸다. 쏟아지는 잠을 청한 뒤에야 겨우 기력을 되찾았다.

끌려간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곳, 끌려간 사람만 아는 곳

류 씨는 한동안 고향친구의 집에 머물렀다. ‘하루 일하고 하루 밥 먹기도 힘든 시절’이었기에 경제형편의 어려움과 눈치 보기가 뒤따랐지만, 짧게 깎인 머리털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밖에 나갈 수 없었다.
그런 류 씨의 사정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며 쓴웃음을 뱉었다.

“친구가 물어봐서 대답해줘도 몰라. 설명해줘도 안 돼. 나만 나쁜놈 되는 거야. 얘기하기도 싫어. 부산에 사는 친구들한테 이야기 하니까 몰르더라고. 형제복지원에서 가까운 교도소는 알아도 형제복지원은 몰르더라고. 완전히 밖에서 알지를 못해요. 형제복지원이 그렇게 넓어도 산 속에 들어가서 안 보여.
사람들이 모르는 걸 어떡해요. 내가 그렇게 설명을 해도 안 믿는데, 안 믿지. ‘어디 그런 데가 있느냐, 거짓말 하지 말라’고 그러지.”

명절(구정)이 돼 고향을 찾은 류 씨는 부모님께 형제복지원에 끌려갔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그의 부모님 역시 형제복지원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류 씨는 형제복지원에 있을 때 누군가 ‘부모와 같이 가면 괜찮다’고 말했던 기억을 용기 삼아, 빼앗긴 신분증과 물품을 찾기 위해 아버지·작은아버지와 함께 형제복지원을 찾았다.

그때 류 씨가 본 수용자 명단 일부 중 세 명의 이름에는 체포 됐다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보호자들이 찾으러 가잖아요. 그럼 그 안을 견학시켜준다고. 외부 사람들이 시설 이런 데 둘러보면 ‘아, 잘 돼 있다’고 그래요. 속도 모르고. 그런 걸 위해서 견학을 시켜주는 거야.
사무실 가서 ‘지갑하고 다 내놔라’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위해서 쓰게 그냥 놔둬라’ 하더라고. 신분증만 주더라니까. 나 입고 왔던 옷 하고, 시계 이런 거 뭐이고 다 압수하고 주도 안 해.”

류 씨의 부모님이 한 말은 박인근 원장이 했던 말과 같았다. 류 씨의 기억에 따르면, 박인근 원장은 해외로 자주 떠났다. 박인근 원장은 해외를 다녀온 날이면 교회 단상에 올라 ‘(시설이) 우리나라처럼 잘 돼 있는 데가 없다’고 말했다.

류 씨는 명절을 고향에서 보낸 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신분증을 되찾았으니 직장에 복귀해야 할 차례였다. 연락도 없이 사라진 류 씨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의 상태를 보고 ‘왜 사람이 그렇게 돼서 왔느냐’고 놀랐다. 하지만 직장 사람들 역시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기 전까지) 평범한 생활했죠. 어디 들어간 적도 없고. 근디 교도소 들어간 것 같이 죄인처럼 들어간 거니까. 창피해서 말도 못 했어요. 잘못헌 건 없는디 억울하지요. 예를 들어서 죄를 지어갖고 차라리 교도소를 가고 말지. 그 안에 있던 사람들 다 그런 생각이죠. 언제 들어가고 언제 나가는지 기약이 없으니까. 탈출 안 했으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있었을 거야. 무조건 잡아들이는 거이 목적이니까.
아무래도 (사회에 나와서) 적응하기 힘들죠. 초창기에는 나와서 손에 일이 안 잡히는 거예요. ‘나가 이러면 안 되지, 이러면 안 되지, 잊어야지’, 지우려고 애를 썼죠. 놀고 있으면 생활이 안 되잖아요.”

죄인으로 살았던 억울함 ‘풀고 싶다’

1987년 1월 박인근 원장이 구속됐다는 소식을 접한 류 씨는 잠깐의 기대 뒤, 실망과 분통함이 터져 나왔다고 떠올렸다.

“박인근이 교도소 사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 살았어. ‘저렇게 끝까지 기세가 좋구나’ 그랬지. 뭐 훈장도 받은 사람인데. 원망하는 대상은 박인근이지 뭐. 박인근이 낯짝도 보기 싫어요. 제일 (나쁜) 사람은 그때 당시 정부야. 대통령 지시 아래 다 이뤄졌으니까. 부산시 시청 공조 아래 다 이뤄졌으니까. 공무원들이 그렇게 안 하고는 절대 이렇게 될 수가 없어요.”

‘그런 곳이 어디 있느냐’며 류 씨의 말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사회에 드러난 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말을 믿었다.

류 씨는 ‘지금은 고향친구도 알고 그러니까 잘 됐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한다. 내가 (해당 사건 소식을) 보지 말라고 해도 어떻게 되고 있나 본다’며 외로움을 달랬다.

“언론에 알리기로 결심한 이유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죠. 우리가 고생했던 것을, 진상을 밝혀줘야지. 죄도 안 짓고 죄인으로 살았으니까. 젤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일단 진상부터 밝혀 놓고, 그 뒤에 보상이야 하든지 어쩌든지. 우리가 누명은 벗고 가야 하니까. 배후에 국가가 있다. 국가의 잘못이죠. 왜 죄도 없는 사람이 거 들어가 갖고 생고생을 해요. (형제복지원법 제정이) 잘 됐으면 쓰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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