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row House의 대표를 맡고 있는 마이클 씨가 우리를 위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2011 welfarenews
▲ Delrow House의 대표를 맡고 있는 마이클 씨가 우리를 위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2011 welfarenews

CAMPHILL은 지적장애인의 탈시설화에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까?-①

김정하(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
김병용(전북시설인권연대 사무국장)

첫날의 긴장을 늦추고 우리는 둘째 날의 여정을 시작했다.
전날 런던지하철의 파업으로 헤맸던 것을 감안하여 아침 일찍 20인승 버스에 올랐다. 다행히 연수자 모두가 한 버스를 타고 가는 유일한 여정이여서 서로 헤맬 걱정을 안 해도 되는 날, 런던시내를 빠져나와 교외분위기로 접어들자 흡사 소풍이라도 가는 아이들처럼 모두가 약간은 들떠 있었다.
그 마음속에는 말로만 듣던 캠프힐에 대한 각자의 기대가 있었으리라. 한국의 장애인시설이 ‘장애인공동체’라 표방하지만, 제대로 공동체정신을 실현하는 곳을 보지 못한 터라, 혹시 그 유명한 ‘캠프힐’은 어떨까? 다를까? 새로운 대안일까? 들뜬 마음에 긴장까지 되었다.

Delrow House 입구와 전경, 카페테리아 등이 있다. ⓒ2011 welfarenews
▲ Delrow House 입구와 전경, 카페테리아 등이 있다. ⓒ2011 welfarenews
“이곳은 삶을 공유하는 곳입니다”
캠프힐 앞에서 연수참가자 미소와 혜정이 웃고 있다.
 ⓒ2011 welfarenews
▲ 캠프힐 앞에서 연수참가자 미소와 혜정이 웃고 있다. ⓒ2011 welfarenews

우리를 맞이한 마이클씨의 첫마디이다. 유쾌하게 우리를 맞이한 마이클씨, 흡사 서울근교의 전원주택과 같은 집들 여러 채가 모여 있는 마을, 한쪽으로는 흰벽의 캠프힐 사무실과 주변을 에워싸고 각종 작업장과 카페테리아, 칼 코닝 홀(Karl Konig Hall; 연회장, 공연장으로 주로 쓰이는 곳), 밭과 정원들이 펼쳐져 있었다.

“소속감을 느끼고 평화롭게 사는 것, 영적인 삶, 이것이 캠프힐의 정신이다” ; 캠프힐의 역사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의 캠프힐 홈페이지 첫 화면. ⓒ2011 welfarenews
▲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의 캠프힐 홈페이지 첫 화면. ⓒ2011 welfarenews

우리가 방문한 캠프힐은 영국 런던에 위치한 ‘Delrow House’ 였다.
캠프힐은 1940년 스코틀랜드 에버딘 지역에 처음 설립된 후, 현재 세계 곳곳에 100여 개의 공동체로 확산되었는데 ‘Delrow House’ 는 성인들이 거주하는 캠프힐 중 하나였다.

마이클씨의 설명에 따르면 캠프힐은 정신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서 1940년대에 사회적 갈등에 기초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현재 북아일랜드, 잉글랜드 등에는 51개 센터가 있고, 오스트리아 태생이며 유태인이었던 칼 코닝(독일어로 칼 쾨니히(Karl K?nig))에 의해 창시되었다.

칼 코닝은 그 당시 유태인과 장애인에게 배타적인 사회였던 오스트리아, 특히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정책을 피해 1938년 스코틀랜드로 피난하게 됐다.
칼 코닝이 스코트랜드에 처음 살았던 집이 캠프힐 하우스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공동체운동의 이름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캠프힐은 처음 장애아동을 위한 공동체로 시작했는데 그 당시 장애인의 복지서비스가 전무했던 터라 장애인들은 주로 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었다.

칼 코닝은 장애인이 사회에 포함되고, 사회가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후 1950년대에 들어서는 성인장애인공동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이클은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소속감을 느끼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 기독교정신에서 출발한 캠프힐인 만큼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캠프힐의 정신이라고 소개했다.

※캠프힐의 역사, 추구하는 가치, 문화와 관련해서는 “캠프힐에서 온 편지(저자 김은영)”를 참조하기 바란다.

“빵, 도자기, 등공예, 양모펠트공예, 유기농작물재배, 마을가게 등 공동생산의 현장”

마이클은 캠프힐의 역사와 정신을 아주 짧게 소개했다. 그리고서는 둘러볼 곳이 많다며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마 캠프힐의 정신을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그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해서 인 것 같다.
휠체어를 탄 연수자들이 이동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출입구와 바닥이었지만, 지적장애인들이 생활하는 곳이니 그러려니 살짝 마음을 달래며 Delrow House를 둘러보았다.

제빵실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규식, 소연. ⓒ2011 welfarenews
▲ 제빵실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규식, 소연. ⓒ2011 welfarenews

처음 간 곳은 소위 제빵, 제과실이었다. 잘생긴 스텝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 작업장은 1주일에 총3일 문을 여는데, 흰빵, 잡곡빵, 케익, 쿠기 등 제과점에서 볼수 있는 다양한 빵들을 생산하고 있었다. 옆에서 마이클이 ‘조명이 밝고 따뜻해 일하기 제일 좋은 곳’이라고 귀띔한다.

맛있는 빵냄새가 연수자들의 입안을 자극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빵은 이 곳 Delrow House에 사는 11가구를 위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재료는 유기농재료를 사용하며, 매주 화수목요일 정해진 시간에 각 House에서 식사재료를 가져간다고 한다. 여기서 일하는 스텝과 장애인들(캠프힐을 소개한 책자에 따르면 거주장애인들을 Villager, 즉 마을 사람이라고 부른단다)은 다양한 사람들이며 대부분 3년째 일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길이 평탄하진 않았지만 캠프힐 내부에서 각자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2011 welfarenews
▲ 길이 평탄하진 않았지만 캠프힐 내부에서 각자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2011 welfarenews

아쉽게도 제빵실 옆에 있는 마을가게는 들어가 보질 못했다. 우리가 간 시간엔 문이 닫혀 있었다. 창문사이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을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사갈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마을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건들은 외부에서 대량 구입해서 진열해 놓는다고 했다.

한국의 풀무학교가 있는 홍성에도 무인가게가 있다. 홍성 풀무학교에서는 각자가 가게에 와서 필요한 물품들을 사고, 붙여있는 가격만큼 돈통에 돈을 넣고 가면 된다. 외상 할 사람들은 장부에 적어놓고 다음에 와서 빚을 갚기도 한다.
홍성의 풀무공동체처럼 운영하는지 어쩐지 자세히 물어보지 못해 아쉬웠다.

캠프힐을 소개한 책자에 따르면 일주일에 한번씩 마을에 살면서 필요한 용돈을 나눠 갖고, 그 돈으로 마을가게에서 필요한 물건을 소비한다고 한다. 각자가 필요한 지출규모를 모아 생활비를 책정하고 회의를 통해 지출을 결정한다고 한다.
또 SBS스페셜에 소개한 것은 마을창고에서 쌓아놓은 물자들을 각 House마다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쓴다고 소개했다.
바로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공동체정신을 잘 볼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방문한 Delrow House에서는 이 부분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아 매우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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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도자기 굽는 일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너무 예쁜 도자기 작품들이 공예방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맞으니, ‘와 예쁘다’는 말이 연신 터져나왔다.
점토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속 창조성을 끄집어 내 아이디어를 얻어 작품을 만드는 것이라 스텝이 전했다. 이곳 공예방은 총 8명이 일하는데, 스텝과 조수가 4명, 거주장애인이 4명, 1:1의 비율이었다. 벌써 년말에 있을 성탄절 준비로 바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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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특산물은 뭐니뭐니해도 양모로 만든 것일 것이다.
캠프힐에서도 양모로 펠트작품들을 볼수 있었다. 양모펠트 신발, 벽걸이용 메모꽂이, 펠트그림, 악세사리, 인형 등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펠트를 하기 위해 양모를 계속 밀어서(마치, 밀가루반죽을 봉으로 밀 듯이) 단단한 양모천을 만드는 작업은 단순하지만 너무 힘들어 보였다.
손님들이 왔는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 같은 방문자가 많아서 익숙하신 걸까?

그들과 스텝들이 만든 작품을 보고 있는데 작업에 열중하던 한 여성이 물었다. 영어가 짧은 나에게 말을 걸어 순간 너무 당황했다. 눈을 피했다.
그러나 그녀는 “What's your name?"이라며 밝게 웃었다. 순간 ‘아~ 다행’ 그녀는 상대방의 이름을 물어보는 취미가 있었다.
한국어 발음이 어려웠을 텐데 연수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물어본 그녀는 이름을 외우기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을 전달하자 손에 하나가득 니들펠트 방울들을 들고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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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welfarenews

공예방중에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등나무 공예방이었다. 이곳에서도 11가구의 각 House에서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것들을 주문 받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각 요구사항을 듣고 설계도를 그린 그림들이 주문표라 했다. 또 보통의 가정에서 필요한 바구니를 만들어 축제기간에 파는데, 많이 팔린다며 자랑하였다.
여러 작업장을 돌다보니, 거주 장애인들이 각자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 찾고 선택할까? 같은 일을 계속하는게 지겹진 않을까? 일하기 싫을땐 어떻게 할까? 공동노동의 합의를 어떻게 이뤄낼까? 궁금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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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힐에서 중요한 작업중에 하나가 농사일일 것이다.
Delrow House에선 논농사는 없고 주로 야채를 재배한다고 한다. 대파, 양배추, 감자, 콩 등 다 유기농으로 재배하고 있고 공동생산된 재료들은 필요한 만큼 분배한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쌀쌀한 날씨여서 벌써 농한기인지 농사일을 하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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