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과 학대에서 탈출한 임씨…“죽어나가는 사람을 보았다” 증언
대책위 “장애인을 ‘보호’대상으로 본 우리사회의 책임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장애인 21인을 입양해 ‘천사 아버지’라는 가면을 만들고, 그 안에서 폭력과 학대는 물론 수급비 까지 횡령했던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사건이 지난해 6월 세상에 알려진지 10개월.

가해자 장OO 씨의 폭력과 학대로부터 탈출했던 피해자 임OO 씨(본명, 주민등록 상 장성대, 청각장애)가 나타났다.

▲ 임OO씨의 팔에는 '장성대'라는 이름과 '환자'라는 문구, 그리고 전화번호 등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정두리 기자
▲ 임OO씨의 팔에는 '장성대'라는 이름과 '환자'라는 문구, 그리고 전화번호 등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정두리 기자
장씨가 서울 내발산동에서 사랑의 집을 운영할 당시 여덟살의 나이로 장씨에게 보내져 입양자녀로 살다 8년 만에 탈출했다는 임씨. 팔에 새겨진 문신과 바늘에 찔려 실명된 눈까지 끔찍한 당시의 기억을 몸에 남긴 채 그는 41세가 됐다.

임씨는 당시 장씨의 폭행과 학대, 방치 등으로 사망하는 사람을 봤다는 결정적 증언을 내놓았다. 하지만 너무 긴 세월 속에 증거를 찾기란 쉽지 않고, 장씨는 재판과정에서 여전히 ‘사랑으로 돌봤다’라는 변명만 늘어놓을 뿐이다.

장애인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30여년 동안 가려져 왔던 귀래 사랑의 집 사건은 피해자 증언과 함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시사를 알리며 공분을 사고 있다.

문신과 골절, 임씨의 몸에 남겨진 끔찍한 기억 ‘사랑의 집’

임씨는 지난해 6월 귀래 사랑의 집 사건이 밝혀지면서 아들을 장씨에게 보낸 뒤 생사를 알 수 없다며 찾아왔던 안OO 씨의 아들이었다.

임씨는 언론을 통해 공개된 귀래 사랑의 집 사건을 보고 뒤늦게 찾아왔고, 지난 달 30여년 만의 모자 상봉이 성사됐다. 다행이 현재 임씨는 경기도 인근의 한 공장에서 잘 적응해 일하고 있었지만, 사랑의 집에서 보내진 이후 그의 삶은 충격적인 기억들로 얼룩졌다.

임씨는 장씨에게 보내진 이후 지금까지 교육을 전혀 받은 적고 수화조차 배운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임씨와의 의사소통은 장씨에게서 탈출한 뒤 TV를 보고 익힌 글씨 및 생활을 위해 터득한 몇몇 수화단어들을 토대로 한 ‘몸짓’을 통해야 가능했다.

임씨가 서울에 위치했던 사랑의 집에 보내진 것은 여덟살. 그는 ‘장성대’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다섯 번의 시도 끝에 16세 경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임씨는 “계속되는 폭행과 학대, 배고픔과 두려움을 견딜 수 없었다.”며 “장씨와 장씨부인은 항상 화가 나 있었고, 언제나 맞아야 했다. 살고 싶어 탈출했다.”고 이야기 했다.

임씨의 탈출 시도는 번번이 그의 팔에 새겨진 문신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의 팔에는 지난해 6월 장씨와 함께 살고 있다 구출된 피해자 중 한명인 또 다른 ‘장성대’씨와 동일하게 이름과 전화번호, 환자라는 문구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임씨에 따르면 장씨가 직접 바늘로 새겼다고.

문신을 본 사람들은 전화를 걸었고 탈출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잡혀올 때마다 폭행과 가혹행위가 이어졌다.

한번은 도망갔다 잡혀온 그를 장씨가 바늘로 눈을 찔렀고 임씨의 한쪽 눈이 실명됐다. 손톱을 뽑거나 이를 망치로 때려 뽑기도 하는 등 수많은 상습적 가혹행위의 증언이 이어졌다.

▲ 사랑의 집 사건의 피해자 임OO 씨는 탈출 과정에서 붙들려 돌아온 뒤 장씨가 바늘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실명됐다. ⓒ정두리 기자
▲ 사랑의 집 사건의 피해자 임OO 씨는 탈출 과정에서 붙들려 돌아온 뒤 장씨가 바늘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실명됐다. ⓒ정두리 기자
마지막 다섯 번째 탈출에서 임씨는 사람들이 문신을 볼 수 없도록 팔짱을 끼거나 접근하는 것을 단호하게 막아왔다.그렇게 8년간의 끔찍했던 사랑의 집 생활에서 도망한 임씨는 길거리를 떠돌다 한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시설에 보내졌고, 이곳에서 생활하다 성인이 되면서 독립해 취직을 했다. 그리고 몇몇 곳을 거쳐 현재에 이렀다.

하루 종일 집안일을 하고 쪽잠을 자는 여덟살…“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봤다.”

그는 어린 시절이었지만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청각장애인이었던 임씨는 당시 장씨가 데리고 있던 20여 명의 거동이 불편한 입양자녀를 돌보는 일을 도맡아했다. 기록상 장씨의 입양자녀는 21인이지만 임씨가 사랑의 집에 살던 당시 기억하는 입양자녀는 22인~24인까지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 이름에 해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조차 알 수 없는 ‘바꿔치기’, ‘중복등록’의 가능성에 그의 증언이 힘을 실었다. 

반찬도 없이 매우 적었던 밥을 식판에 받아 모든 아이들을 먹이고 설거지를 했다. 밥은 하루 아침 저녁 두 번이었고, 하루에 한번 밥을 먹을 때도 있었다고.

새벽 5시경에 일어나 집 마당에 있는 화단을 가꾸는 일에서부터 청소는 물론 20여 명의 아이들을 씻기고 밤늦게까지 빨래를 해야 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일정에 그는 매일 밤 쪽잠을 자야했고, 이 모든 과정에서 속도가 늦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이유로 혹은 이유 없이 폭행이 연이어 날아왔다.

장씨에게 보내진 고작 여덟살 짜리 어린아이 임씨의 하루는 ‘집안일’이 전부였던 것.

임씨 외에 하루를 ‘일’로 보낸 이가 또 있었으니, 바로 지난해 6월까지 장씨가 데리고 있었던 장성민 씨였다. 임씨가 집안일 담당이었다면, 장성민 씨의 임무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염소를 기르고 돌보는 담당이었다. 둘은 장씨와 장씨 부인의 안마를 하거나 흰머리를 뽑는 일도 수시로 했다고 임씨는 전했다.

▲ 사랑의 집이 서울에 위치할 당시 장씨에게 보내졌다 폭력과 학대로 부터 탈출했던 임OO 씨가 기억을 더듬어 증언을 내놓았다. ⓒ정두리 기자
▲ 사랑의 집이 서울에 위치할 당시 장씨에게 보내졌다 폭력과 학대로 부터 탈출했던 임OO 씨가 기억을 더듬어 증언을 내놓았다. ⓒ정두리 기자
장씨와 장씨 부인에 의한 폭력과 학대도 그의 기억에 생생했다. 본인에게 가해졌던 폭행 외에도 함께 살고 있던 입양자녀들도 똑같이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임씨의 증언. 그가 기억하는 ‘매질’의 도구는 두꺼운 각목일 때도, 긴 쇠파이프 일 때도 있었다. 임씨의 몸 곳곳에 남은 흉터가 그 곳에서의 구타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다.

옷도 없었다. 속옷도 없이 상의와 하의만 입었고, 평상시에는 남녀와 나이에 관계없이 옷을 벗겨 놓았다고 한다. 그러다 손님이 오거나 사진을 찍어야 할 때면 옷을 입혔고, 장씨와 장씨 부인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천사’의 모습으로 ‘변신’하곤 했다고 임씨의 기억은 이야기 했다.

특히 임씨는 당시 장씨의 입양자녀가 죽어있는 것을 보았고, 장씨가 데리고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기억도 전했다.

임씨는 “머리를 감기려고 깨우려고 했는데 죽어 있었고, 맥을 짚어봤는데 뛰지 않았다.”며 “장씨 부인에게 이야기 하자 장씨가 아이를 비닐 봉투 같은 곳에 담아 차에 싣고 나갔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장씨는 혼자 돌아왔고, 그 아이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어 “그 아이는 사망할 즈음 구토를 했고 굉장히 야위었으며, 숨을 몰아쉬기도 했었다.”며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특히 임씨의 증언에 따르면 아침에 밥을 먹이거나 씻기다 보면 사라지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사라지기 이전 매우 마르고 구토 증세를 보이거나 밥을 먹지 못하는 등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사회에 남겨진 과제…“장애인을 ‘보호’대상으로 본 우리사회의 책임 있다.”

외부로 보이는 모습은 장애인을 보호하는 ‘천사 아버지’ 였지만, 실제 폭력과 학대를 일삼고 후원금을 착복했다는 장씨에 대한 증언들.

그러나 너무 오랜 기간이 지나 증거물을 찾기 어렵거나 공소시효가 지나 장씨에 대한 처벌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더욱이 입양이라는 이름으로 울타리를 만들었던 사랑의 집은 ‘가정’이라는 이유로 접근이 어려웠고, 긴 시간이 지나 ‘보호’라는 미명아래 학대를 감내해야 했던 이들의 흔적을 찾기조차 쉽지 않은 상태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강원 팀장은 “사회는 장애인을 한사람 한사람 사람으로 보지 않고 특별한 존재로 누군가 돌봐줘야 하거나 밥을 떠먹여 줘야 하는 ‘통제’가 필요한 집단으로 보고 있다.”며 “단순히 장애인을 데리고 있다는 이유로 ‘대단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잘못된 인식이 그들의 인권과 권리를 빼앗아 갔다.”고 사회의 책임을 시사했다.

▲ 장애인 21일은 입양해 폭력과 학대를 저질러 재판 중인 귀래 사랑의 집 가해자. 그에 대한 재판은 진행중이며 여전히 '사랑으로 보호했다'는 변명만 늘어놓을 뿐이다. ⓒ웰페어뉴스DB
▲ 장애인 21일은 입양해 폭력과 학대를 저질러 재판 중인 귀래 사랑의 집 가해자. 그에 대한 재판은 진행중이며 여전히 '사랑으로 보호했다'는 변명만 늘어놓을 뿐이다. ⓒ웰페어뉴스DB
특히 귀래 사랑의집 사건의 가해자 장씨에 대한 형량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물론 형량의 무거움이 능사는 아니지만, 장씨의 악행이 법 앞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너무 오랜 기간이 지나버린 ‘공소시효’와 시간 속에 묻혀버린 ‘증거’가 발목을 잡고 있다.

김 팀장은 “장씨의 30년간 악행은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나버렸다. 학대에 있어서도 가해자를 처벌하기에는 요건이 까다롭고, 정도가 생명의 위협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을 비인간적 생활환경에 방치하고 먹을 것을 주지 않거나, 자유를 박탈하는 등 방임에 대한 제제규정은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가해자 장씨가 ‘천사아버지’를 가장해 장애인을 모집한 것 자체가 영리를 목적으로 유인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미 30여년이 지난 사안.”이라며 “사망한 장애인들에 대한 책임도, 병원 안치실에 시신을 10년이 넘도록 방치한 기록들도, 금액상으로 어마어마한 후원금 착복과 수급비 횡령도 공소시효가 지나 기소조차 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속속 밝혀지는 증언들, 그러나 학대 속에서 장애인들을 구해낼 실질적인 법적 조항도 강제성도 부족하다는 지적 속에 장애인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의 시급함이 시사되고 있다.

김 팀장은 “장애인복지법이나 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등에관한법률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학대 등의 행위를 금지하고 처벌규정까지 명시하고 있지만, 문제는 법을 해석하는 사법기관에서는 법률상 애매모호한 규정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라며 “결국 해당 법률상 문제는 되지만 실질적 적용과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질타했다. 이어 “장애인들의 인권과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법률과 더불어, 학대 상황에서 이를 신고하고 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또 하나 피해자들은 ‘감금’상태에 놓여 있었지만 ‘보호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입바른 말로 묵인한 사회 역시 문제였다.

장애계 관계자들은 대부분 장애인 시설이 출입문을 폐쇄하거나 감금 등이 일어나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사회는 ‘장애인의 가출 방지와 보호를 위해서’라는 그들의 답을 들을 뿐, 과연 장애인들의 의사가 반영된 것인지 그들을 가둬도 된다고 누가 판단한 것인지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웰페어뉴스DB
▲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웰페어뉴스DB
“귀래 사랑의 집 피해자들은 앉아 있는 것을 잘한다. 하루 종일 화장실도 가지 않고 같은 자세로 가만히 앉아만 있다. 이골이 난 그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평생이 어땠는지 가슴이 아팠다. 3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사람들의 인생은 울타리 안도 아닌 방 안에 있었던 것이다.”(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강원 팀장)

장애인을 보호한다는 ‘미화’된 거짓과 법적 허점을 이용해 30여년 동안 폭력과 학대를 저질러온 귀래 사랑의 집 사건. 그 안에서 몇 명인지 조차 정확하지 않은 피해자들은 ‘인권’이라는 단어 조차 모른 채 기억속에서 살아져 갔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구속된 이후 계속된 재판이 진행 중인 가해자 장씨는 여전히 ‘사랑으로 돌봤다’라는 변명만 늘어놓을 뿐이다.

장애인의 인권과 권리를 이야기 하는 시대. 하지만 여전히 장애인을 격리하거나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이 변화의 발목을 붙들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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